춘천이야기
춘천의 인물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춘천과 관련된 인물은 신라의 진덕여왕 원년에 대아찬(大阿찬) 수승(守勝)을 우두주의 군주
삼국시대에 춘천과 관련된 인물은 신라의 진덕여왕 원년에 대아찬(大阿찬) 수승(守勝)을 우두주의 군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으며 효소왕 7년에 아찬 체원(體元)을 우두주의 총관(摠官)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춘천과 관련된 최초의지방관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태조 23년(940)
신숭겸(申崇謙)
광해주(光海州 : 춘천)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었다.
광해주(光海州 : 춘천)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하였다. 궁예(弓裔) 말년에 기병대장 (騎兵大將)이 되었다. 그런데 궁예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죄없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죽임을 당하여 세상이 불안해지자 모두가 궁예를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숭겸은 기병대장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비밀 회동을 통해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모의하고 경명왕(景明王) 2년(918) 6월 을묘에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 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왕건은 장군들의 추대를 사양했으나 신혜왕후 (神惠王后) 유씨(柳氏)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인해 거사를 결심하고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혁명을 일으키니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고려 태조로 그는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고려 태조는 즉위 후 고려 건국의 공로자인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을 1등공신으로 삼고 금·은그릇과 비단옷·침구 등을 내려공을 표창했는데 신숭겸은 고려 태조를 보필하면서 후삼국 통일을 위해 신명을 바쳤다. 태조 왕건은 918년 8월에 각처의 세력가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후한 예물과 겸손한 언사로서 화친의 뜻을 보여 전쟁을 피하고자 했고, 후백제(後百濟)의 견훤 (甄萱)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와 후백제는 고려 태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7∼8년 동안 큰 충돌없이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태조 9년(926)에 견훤이 고려에 볼모로 보낸 진호(眞虎)가 병사(病死)한 것을 트집잡아 견훤이 고려를 공격함으로서 두 나라의 평화관계는 깨지고 치열한 교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세력권인 안동(安東)으로 부터 상주 (尙州)를 거쳐 협천(陜川 : 합천)·진주(晋州)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일대에 서 전선이 형성되어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서 후백제의 견훤은 태조10년(927) 9월 신라의 경주에 침입하여 경애왕 (景哀王)을 죽이고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친히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대구 공산(公山)에서 견훤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세가 태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은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기병대장으로 참여한 신숭겸 장군은 원보(元甫)·김락(金樂) 장군과 함께 힘을 다해 적과 싸워 태조를 단신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 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태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과 철(鐵) 및 그의 아들 보락(甫樂)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하였다. 이처럼 신숭겸 장군은 고려 건국의 1등공신일 뿐만 아니라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자신을 던져 태조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936년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역사의 장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시대
한백록(韓百祿)
조선중기 무신으로 춘천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지(綏之)이다.
조선중기 무신으로 춘천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지(綏之)이다. 선조 13년(1580) 알성무과(謁聖武科)에 합격, 진잠현감(鎭岑縣監)을 거쳐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주역을 담당하고 부산첨사(釜山僉使)에 제수(除授)되었다. 1592년 7월 17일 역전(力戰)하다가 부산포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때 녹훈이등 (錄勳二等), 인조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영조 27년(1751)에 정려(旌閭)되었고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묘가 춘천시 서면 금산3리에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춘천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사회
김유정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 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록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을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필승前. 3.18)에게 편지 쓰기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